제주오름

어느여인의 한이서린 각시바위(서귀포의 명소)

제주 우보 2011. 4. 6. 09:29

각시바위오름은 서귀포시 호근동에 위치하는 해발 395m의 기생화산으로 오름의 정상에 있는 각시바위의 이름을 따서 각시바위 오름이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한자로는 각수악이라 하기도 하고 학의 날개짓을 닮았다하여 학수악, 학수바위라고도 한다.

각시바위는 학이 알을 품은 형국이어서 삼매봉의 뱀이 알을 먹으려고 오면 날개를 펴고 부리로 쪼으려는 모양을 하고 있어 ‘학수바위’로 불린다고도 한다.

 오름의 북쪽사면은 완만하며 숲이 무성하고 반면 남쪽은 등성이는 매우 가파르다.

 길 위에서 쳐다보면 험하고 가파라서 도저히 올라갈 엄두가 나지 않지만 포제단에서부터 20여 분 걸으면 금세 정상에 다다를 수 있다.

  대륜동 서호마을 윗길 중산간 도로 용천사 입구 버스정류장에서 북쪽 1.3㎞ → 학수바위 팻말에서 1㎞ → 호근동 공도묘지를 지나 포제단으로 오른다

   

호근동에서 찍은 각시바위 모습

 

포제단으로 오르기 전

 

 

각시바위 정상에서 바라본 서귀포 풍경

 

 

 

 

 정상에 오르면 눈 앞에는 한 폭의 풍경화가 펼쳐진다.

즐비하게 늘어서 도열한 밀감밭 너머로 지귀섬, 섶섬, 새섬, 범섬, 문섬이 한눈에 들어온다.  

주변 경치가 아름다워서 예로부터 선비들이 이곳에서 풍류를 즐겼다고 한다

 

 

 

몸을  돌리면 완만하고 부드러운 한라산 자락과 오름들이 한눈에 들어온다.

제주시에서 바라보는 한라산 모습과는 또 틀리다

 

 

정상바위에는  단옆식물인 일옆초가 자라고 있다

 

 

           여인의 슬픈 설화가 서려 있는 각시바위, 지금도 그 아래 동굴에서는 아이 낳기를 소망하거나 소원이 성취되기를 바라는

           사람들이 기도하러 드나들고 있다.  옛날 이 부근 마을에 귀한 집안 며느리가 몸에 태기가 없어 고민하였다.

           여러 해가 되어도 아기를 얻지 못하자  호근리 북쪽 한라산 중턱에 있는 절에 가서 백일기도를 드렸다.

           목욕재계하고 정성을 다하여 밤낮으로 불공 기도를 드리던 어느날 밤 그 절의 중에게 몸을 빼앗기게 되었다. 

           백일이 다 되어 집으로 돌아가야 할 그날 밤에 여자는 시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절 뒤에 있는 그 바위에 올라가 하늘을 향하여

           울부짖으며 자기의 잘못과 운명을 슬퍼하며 밤새 울다가 자진하여 죽어버렸다. 여자가 죽자 얼마 없어서 그 자리에

           이상한  바위가 섰는데 그때부터 이를 열녀바위라 불렀다고 한다.

 

 

 

각시바위 정상에서 발견한 거북이를 닮은 모습. 바다에 돌아가고 싶은듯 바다를 향해 있다.

사냥길에 나선 원님들은 각시바위 정상에 있는 넓은 반석 위에서 휴식과 음식을 취하는 것이 상례였다.

 사냥길에는 함께간 따라가서 노래와 춤을 추며 놀았는데 원님의 총애를 받는 관기에게 질투심을 느낀 한 기생이 총애 받는 관기를  밀어뜨려 서 절벽 아래로 떨어뜨렸다. 원님은 불쌍히 여겨 각시바위 아래에 장사를 지냈는데, 이름 없는 그 기생의 무덤이 지금도 있다고 하는데---

포제단에 핀 동백꽃

 

 

포제단에 있는 동자석과 바위

 

 

각시바위에 있는 묘(문씨집안)

 

무덤 앞에 있는 학의 알처럼 생긴 바위

 

 

각시바위 무덤(위쪽)에 있는 비석

               공 휘흥좌 계남평 고향공진사 문성위 휘(죽은사람의 이름)는 흥좌 계는 남평이며 부는 향공진사 문성위다

               가경원년 신묘 취평규임씨생 삼남사녀 가경원년(청나라연호 1796년 신묘년) 평규박씨로 장가가서 3남4녀를 두었다

               겸 취동래정씨 생 1남 치환 차 사겸   그리고 겸하여 동래정씨 부인밑으로 장남 치환 차남 사겸을 얻었으며

               취양~ 3남3녀 치혁 치안 치길 차 사건 양씨부인 밑으로 3남3녀 치혁 치안 치길 다음으로 사겸을 두었으며

               취밀양박 후 취고부이씨 생 3녀무자 월 대 양손 밀양박씨 뒤로 고부이씨와 결혼 아들없이 삼녀를 두었고 대신하여 양손 재철을 두었다.

               래예 연면불능 진재애종 후손이 연면히 이어지지않은 가운데 수명을 다하니 애통하다

               우 도광19년 사? 칠월이십일일 장 도광19년(1839년) 7월21일 장례를 지내다

               우 학수암원 계(방향) 작 복묘 서묘 학수암 동북방에서 동쪽으로 15도 방향(천간계)쪽에 묘를 만들었다

 

               장손 치환 무후 재부 계후야  장손 치환이 후손이 없어 재부(?)가 뒤를 이었다

               배묘 강정경겸돈원계(방향)작 원 원래는 강정겸돈 동북방에서 동쪽으로 15도 방향(천간계)에 있었다

               쇼와십육년신사 쇼와16년(1941년) 신사월에 고손 문대규가 경건하게 글을 짓다